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탈린그라드 전투 (문단 편집) === 시 외곽의 전투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thoughtsonmilitaryhistory4.weebly.com/239408_orig.jpg|width=100%]]}}} || || 노획한 [[PPSh-41]][* PPSh-41은 많은 장탄수와 강력한 위력으로 독일군에게 노획품으로 인기가 많았으며, 고질적인 생산량 부족에 골머리를 앓던 독일군 당국은 이를 MP717(r)로 명명하고 수리 키트를 제공해 제식 채용하기도 했다. 반대로 소련군 또한 독일군의 [[MP40]]에 대해 제법 호평하고 역시 노획도 많이 했다. 1993년 독일 영화 스탈린그라드에서도 이러한 부분이 반영되어, 독일군들이 소련제 기관단총을 노획해서 사용하는 장면이 나온다.] [[기관단총]]을 든 독일 육군 중위 || 독일군은 공격에 앞서 [[루프트바페]]에 스탈린그라드를 폭격하여 완전히 폐허로 만들 것을 요청했고 스탈린그라드는 무차별 폭격을 받았다.[* 물론 [[독일 본토 항공전]]에서 적지 않은 피해를 입고 서방 연합국에 대한 방어가 필요했기 때문에 생각만큼 소련에서 충분히 공군을 활용하지는 못했다.] 2천여 기의 [[슈투카]] 및 융커스 폭격기로 대규모의 폭격이 이루어졌고 스탈린그라드는 불바다가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피난 행렬이 방위 부대의 소통에 방해되면 안 된다는 이유로 시민들이 피난하는 것을 금지해 버렸고 남녀노소를 불문한 민간인이 방위망을 구성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이 때문에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속출했다. 8월 23일부터 독일의 루프트바페는 폭격기 600대를 포함한 총 2,000대의 항공기를 동원하여 스탈린그라드 도심에 대규모 폭격을 가했으며, 1,000톤 이상의 폭탄을 도시에 투하했다. 48시간 동안의 폭격으로 최소 2만 5,000명에서 4만여 명 이상의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 앤토니 비버는 몇일 간의 폭격으로 4만 명이 죽었다고 했고, 제프리 로버츠는 2일 간의 공습으로 최소 2만 5,000명의 소련 민간인이 죽었다고 말했다.] 리처드 오버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독일의 루프트바페는 도시에 공격을 개시해서 도심 전역을 활활 타오르는 불지옥을 만들었다. 당시 스탈린그라드의 인구가 60만 명이 안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독일의 루프트바페가 육안으로 보이는 그 모든 것을 폭격하여,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고 볼 수 있다. 독일군은 쾌조의 진격을 계속해 선도 부대인 16기갑사단이 볼가강 북서쪽에 성공적으로 진출했고 마침내 완전히 불바다가 된 스탈린그라드에 16기갑사단을 선두로 진입을 시작했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여군]] 지원병[* 주로 고등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으로만 이루어진 소련군 [[https://en.wikipedia.org/wiki/1077th_Anti-Aircraft_Regiment_(Soviet_Union)|제1077대공포연대]]였으나, 이들은 육상 목표에 대한 훈련은 거의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전멸할 때까지 싸웠으며, 이 저항에 독일군은 83대의 탱크, 15대의 수송 차량, 14대의 폭격기, 3개 대대 규모의 병력을 잃은 후에야 포대를 점령했다. 이들을 섬멸한 독일 16사단 병사들이 앳된 소련 여군들의 시체를 발견하자 불길한 예감이 뇌리에 스치기 시작했다.[* 현대에는 미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에서 여군 또한 전투병과에서 활동할 수 있게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만 이 당시 여군들은 모두 비전투병과 보직을 맡고 있기 때문에 전투병으로 활동하는 경우는 비교적 드물었다.] [[http://cpacibodedu.ru/article/3538-u_voynyi_ne_jenskoe_litso/|2016년에 올라온 실제 참전용사 할머니들을 인터뷰한 기사]]를 보면 이 전투에서 1077연대의 생존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현대전에서 '전멸'이라는 말이 글자 뜻과는 달리 부대가 전투 능력을 상실할 정도의 큰 피해를 입었을 때 쓰인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전체 부대의 약 30% 이상 무력화 되었을 경우 전멸이라고 본다. 현대의 군 편제상 육군은 일반적으로 실제 전투 인원은 30%고 나머지 70%는 보급등을 담당하는 전투보조 인원임으로 전투 인원만 잃어도 더 이상의 유의미한 전투수행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부대 자체는 스탈린그라드 이후에도 있다가 1945년 종전에 해체되었으며, 생존한 참전용사들은 전후 훈장까지 받고 지금까지 잘 살아있다고 한다. 기사엔 참전용사들의 자세한 증언이 실려있는데 처음엔 겨우 75명정도가 투입되었지만 나중엔 지원이 와서 전차와 장갑차의 지원도 받아가며 싸웠고, 한 할머니에 따르면 본인이 있던 중대엔 20명의 소녀 포병들이 있었는데 모두 마지막까지 용맹하게 싸웠다고 한다. 또한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 트랙터 공장[* 볼가강을 따라 스탈린그라드 외곽 북동쪽에 위치한 공장으로, 독소전쟁이 터지자 군수공장으로 징발되어 T-34전차를 가장 많이 생산한 공장들 중 하나가 될 정도로 소련군 기갑 전력의 든든한 반석이었다.] 앞 대로까지 진격하자 새로운 반격에 직면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T-34-76|T-34]] 전차들이 시가지 내에서 끊임없이 출현한 것이다. 정찰 부대가 스탈린그라드 내부의 소련군의 대규모 전차부대에 대해선 통보한 바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소련군 전차들의 등장은 미스터리였다. 이들은 도색과 기관총 장착도 못한 미흡한 상태로 그대로 나온 미완성된 전차들이였으며, 공장의 작업자들은 공장 안까지 총탄이 날아드는 상황에서도 전차를 조립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후방의 아군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자신이 만든 전차에 스스로 [[전차 승무원]]이 되어 전차를 몰고 독일군을 향해 돌격했다. 이후 [[T-34-76|T-34]]를 생산할 강철과 조립 부품이 다 떨어지고 나서는 노동자들이 소총을 들고 교전했다. [[https://worldoftanks.asia/ko/news/history/gaudi_stalingrad_battle/|#]] 이때부터 소련군은 독일 공군이 파괴한 건물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와서 격렬한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16기갑사단은 오히려 역습을 받고 후퇴해야 했다. 강력한 저항에 진입하는 데 실패한 독일군은 서쪽에서도 진입을 시도했으나 이 역시도 소련군의 저항에 막혀 성공하지 못했다. 남쪽에서 4기갑군이 진격을 시도했지만 이조차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싸움이 격렬해지면서 지리에 익숙해진 독일 4기갑군은 결국 스탈린그라드 남쪽에서 소련 64군의 좌익을 붕괴시키는 데 성공했고 이때를 틈타 독일 6군이 진격을 개시해 스탈린그라드 북쪽을 방어하던 소련 62군의 방어선을 삽시간에 무너트리고 스탈린그라드 외곽 방어선을 완전히 붕괴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제 스탈린그라드 점령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 같이 보였으나... '''처절한 스탈린그라드 시가전의 '서막'이 오른 것에 불과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